내곁의 시한편

내 곁의 시 한편

소나무, 붉은 이무기

서승현

지난 밤 이무기 꿈이라도 꾼 사람들이나 오를만한 곳이다.
붉은 몸뚱아리의 소나무들 가을 바람 속 또렷이 눈뜬다.

오늘만큼은 물러터진 가슴, 황금빛 호박琥珀처럼 올차게
익으라고 중얼중얼 주문 외며 발걸음 옮긴다. 허청대는 발
걸음, 물 속처럼 깊은 그늘, 이상도 하여라. 붉은 이무기들
스르르 내 가슴을 열고 들어와 첨벙첨벙 몸 담근다. 하늘로
뜨지 못해 푸르게 상심하던 가슴속의 별빛들, 진초록 섬광
으로 제 끝 벼린다. 이 가슴속에서라도 초록 꿈으로 빛나고
싶은 걸까. 빛살들, 주춤주춤 다가선다.

시렁시렁 골짜기 더욱 깊어질수록 함부로 뒤채던 소나무
들의 우울한 몸뚱아리, 빛살들 받아들여 마침내 중심을 잡
기 시작한다. 부박할수록 하늘 높이 빛나고 싶은 마음 더욱
생생해져, 놈들 청록바늘 세워 내 몸 속으로 파고든다. 어
느새 푸른 물결 일렁이는 숲 헤엄치다가 한 곳에 멈춰 서
는 이무기, 산 꿩의 외진 울음 축복하듯 햇살들 나꿔채 천
천히 산아래 서늘한 그늘 퍼뜨린다.

이제부터다. 심지 깊을수록 끈적한 눈물 같은 송진 있기에
소나무들 단단한 결정의 보석 품으리라.
비천飛天의 꿈 꿈틀대는 솔밭머리 소나무들, 붉은 용 흉내
내느라 이 가을 소리 없이 고통스럽다.

참새

김숙자 - 안동 대곡분교 2년

참새는
목소리도 좋고
발가락도 예쁘다.
나는 어예서
참새보다 옳잖노?
새는 내보다 훨씬 좋다.

1969년 5월

http://www.ibooknet.co.kr/mag/index.php?cmd=read&id=1820
에서 퍼 왔습니다.

제 목 : 평범한 교사가 쓴 평범하지 않은 기록

꼭지명 책 이야기 분 류 책 비평
글쓴이 이기영
비 고 <이오덕 교육일기 1,2>, 이오덕 지음, 한길사, 1989

평범한 교사가 쓴 평범하지 않은 기록
《이오덕 교육일기 1·2》(이오덕 지음, 한길사, 1989년)

이 기 영

1.
《이오덕 교육일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교사 생활하면서 그날그날 적어 놓은 것을 담아 낸 책이다. 편하게 말해 이오덕 선생님 일기장이다. 책으로 펴 내면서 ‘교육일기’란 이름을 붙였겠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책으로 펴 내려고 쓴 글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오덕 선생님이 하루하루 일을 적은 일기다.
이 책에는 1962년 9월부터 1972년 7월까지 이오덕 선생님의 10년 교직 생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가 1968년에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했으니 딱 내 초등학교 때 이야기다. 7∼8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내 초등학교 생활만 떠올리며 읽었다. 내가 겪은 옛 일을 다른 사람 일기 보며 몰래 떠올리는 반가움이랄까 그런 재미로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내 어린 시절을 만나 반갑기는 해도 결코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오덕 선생님도 이 기간을 “교직 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괴롭고 울분에 넘치고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맞아, 그때는 그랬지.’ 하며 글에 담긴 이야기보다 잊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즐거운 책 읽기를 한 것이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생활이 내게 결코 즐거운 추억도 아니었으려니와 요즘 우리 아이를 보아도 학교 현실은 그대로 답답하기만 하건만, 그런 답답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즐거운 책 읽기였다니……. 이건 순전히 이오덕 선생님 덕이다. 그 동안 다른 책에서 읽었던, 주제를 분명히 한 딱딱한 글이 아니라 이오덕 선생님을 훔쳐볼 수 있는 ‘일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육일기’라고 하지만 역시 그냥 ‘일기’라고 하는 것이 더 편하다. 이오덕 선생님이 교사로서 쓴 일기이다 보니 교육 행정과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가 많기는 하지만 그런 이야기도 여느 딱딱한 글 같지 않고 글 속에서 ‘이오덕’이라는 한 사람을 더 가깝게 만나는 것이다.

2.
육성회비란 것이 있었다. 난 육성회비 하면 누런 봉투가 먼저 생각난다. 누런 봉투에 달마다 돈을 넣어 갖다 내면 선생님은 봉투 위에 도장을 쾅 찍어 주었다. 돈을 가져오지 못한 아이들은 복도에 나가 벌을 서기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집안 형편에 따라 면제, 150원, 450원, 600원짜리가 있었다. 450원이 제일 많았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면제, 그 다음은 150원, 잘 사는 아이들은 600원 그랬다. 그러다 내가 6학년 졸업할 즈음에는 450원도 별로 없고 거의 600원을 냈다. ‘이제 나도 600원짜리.’ 하는 생각에 으쓱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이미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 남들도 다 내고 있는 600원짜리였건만…….
새 학기에 가정 방문을 한 다음 선생님은 등급을 매기는데 엄마들은 어찌해서라도 150원짜리를 받으려 애쓰고 아이들은 있는 척이라도 하여 600원짜리가 되고 싶어했다. 그때 우리는 서로 말은 안 해도 150원 인생과 600원 인생의 경험을 뼈저리게 한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면제인 아이야 말해 무엇 하리.
내 기억에 우리끼리 육성회비는 ‘얼마짜리냐’가 주 관심이었다. 없는 집 아이는 없는 대로 돈 걱정하느라 속 깊은 걱정을 했고, 그저 먹고 사는 아이들은 600원짜리에 눌려 기도 못 펴는 현실에 주눅 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는 얼마짜리인지 알면 안 되는 것이었다.

1970년 5월 4일 월요일 흐린 뒤 맑다
기성회장이 아직도 안 오고, 또 언제 올는지도 알 수 없어 그만 그 육성회비 통지서란 것을 내기로 했다. 영수증을 달마다 쓸 수 있는 조그만 봉투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속에는 교육장의 빨랫줄같이 긴 ‘계몽’ 편지글(뒷면에 내가 간단히 적어 놓은 편지글도 있는 것.)이 적힌 종이가 접혀 들어가 있다. 아이들은 봉투만 보고도 “육성회비, 육성회비” 하면서 떠들었다.
“육성회비 얼마씩 낸다더냐?”
이렇게 물었더니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 이래도 아이들에게 비밀로 한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장의 계몽 편지까지`─`그 어려운 문구의 글까지 아이들이 알까 봐`─`꼭 봉투에 넣어 보내라는 지시가 내린 것이다.
그럼, 아이들이 돈 가져올 때는 어른들이 돈을 봉투에 넣는 것도 안 보아야 하고, 돈 걱정하는 것도 안 보고 안 들어야 하고, 선생이 돈 받고 봉투 내용을 검수하는 것도 보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참, 눈 가리고 아옹 해도 분수가 있지. 무슨 놈의 속임수가 이 지경인가. 어떤 아첨꾼 관리가 이따위 ‘교육적 배려’ 방법을 고안했을까?(1권, 303∼304쪽)

육성회비는 여러 가지 학교 행사를 하고 교사들 술 먹고 장학사 접대하고 교장 개인 활동비로까지 썼던 돈이다. 그러다 보니 교장에게 아이들은 돈이다. 아이들이 돈으로 보인다. 그러니 규칙에 어긋나도 언제든지 오는 아이는 반갑지만 전학 가기는 어렵기만 하다. 이 핑계 저 핑계 말도 안 되는 까닭으로 전학을 막는 것이다.

1970년 7월 1일 수요일 흐림
오후에 민경석 아버지가 왔다. 강원도에 가 있다고 하면서 아이들 전학증명서 얻으러 왔다 한다. (……) 본교에 가서 전학증명서 해 달라고 말했더니 저쪽 가 있는 곳의 거주증명을 해 와야 된다고 하더란다. (……)
경석이 아버지는 이곳 와서 돈벌이를 좀 해 가야겠다 한다. 무슨 돈벌인가 하니 품팔이라도 들어야 하겠다는 말인데, 아마도 농번기에 일손이 바쁘니 마을에서 품이라도 팔아 갈 모양이다. 없는 사람들 살아가는 사정이 이러하다. 그래도 본교에서는 육성회비 밀린 것 다 내야 증명을 해 준다고 하더란다. 나는 그런 것 다 면제돼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본교에서는 면제자로 되어 있는 이 아이의 육성회비를 한꺼번에 다 받아 낼 욕심으로 동장 증명만 가져오면 전학증명서 만들어 준다고 한 것 같다.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인간들!(1권, 323쪽)

책을 읽으며, 뭐가 뭔지도 모르며 600원짜리가 되고 싶기만 했던 내 부끄러움과 설움을 웃으며 씻어 낼 수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에 주눅 들었던 육성회비 추억을 이오덕 선생님이 이렇게 달래 준다.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인간들!’ 어찌 반갑고 통쾌하지 않겠는가.
처음 《이오덕 교육일기》를 읽었을 때 오랜 숙제를 풀어 내듯 하나하나 내 지난날을 곱씹으며 그렇게 읽었다.

3.
이오덕 선생님은 지방의 한 도시 변두리 학교에서, 또 산골 분교장에서 30리 길을 걸어다니는 것은 보통이었다. 게다가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여 되도록 기차를 타고 나머지는 걸어다니며 볼 일을 보았다. 그렇게 다니면서 새 소리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와 이야기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산이나 들로 다니며 자연을 만났다.
‘산림녹화용 초목종자 채취’를 하러 가는 것도 산에 가는 일이니 아이들이나 선생님 모두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풀씨를 따는 것이야 어찌 되든 선생님은 아이들과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고함치고 만세 부르고 논다. 돌아오는 길에 산등을 타고 내려오다 들국화가 탐스럽게 많이 피어 있는 골짜기를 만난다. 선생님은 그날 ‘그곳이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아 아이들만 없었더라면 그곳 풀밭에 누워 뒹굴면서 밤까지 있었을 거’라며 이렇게 쓴다.

사실은 남들이 그 산골에 와 봤더라면 참 싱거울 것이다. 기암괴석(奇岩怪石)이라거나 계곡을 흐르는 옥 같은 물은 고사하고 나무 한 그루 버젓한 것이 없는 너무나 평범한 풍경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그 평범한 산의 평범한 풍경이 도리어 좋다. 아늑한 골짜기에 풀밭이 있고, 온갖 들풀과 풀꽃들, 벌레들, 그리고 푸른 하늘이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얼마든지 그 자연에 취할 수 있고, 그 산을 사랑할 수 있다. 금강산 같은 곳은 도리어 내 생리에 맞지 않다. 나는 아직 설악산에도 지리산에도 가 보지 않았고, 가 보고 싶지도 않다. (……)
산에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오늘 갔던 그런 평범한 산골짜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씨를 뿌려 가꾸면서 살아갈 내 이상의 생활을 이제는 멀지 않아 곧 실현해 봐야겠다고.(1권, 16∼17쪽)

선생님은 골짜기가 평범해서, 그래서 더 좋다 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취해 살고 싶은 마음에는 더 빼어난 풍경도 더 훌륭한 산도 없다. 평범한 골짜기에서도 “얼마든지 그 자연에 취할 수 있고, 그 산을 사랑할 수 있다.” 평범한 마음, 욕심 없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아늑한 골짜기에 온갖 들풀, 풀꽃들, 벌레들, 거기에 푸른 하늘만 있으면 그만인 소박한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이것이야말로 겉모습에 흔들리지 않고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이름 없는 풀과 벌레도 주인 되어 함께 사는 삶이 아니겠는가. 있는 그대로 자연의 마음인 것이다.
교육보다 제 뱃속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아이들을 볼모로 삼는 소위 ‘교육자’들, 이제 막 교직에 들어선 사람조차 공부는 하지 않고 밤낮 술타령에 도시의 큰 학교로 갈 궁리만 하고, 교육은 없고 억압과 강제와 명령만 있는 학교, 이오덕 선생님은 거의 날마다 이런 현실에 부닥쳐 분노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한다. 그럴 때면 더욱더 하루라도 빨리 “평범한 산골짜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씨를 뿌려 가꾸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30∼40대 중반에는 누구든지 현실에서 분통이 터질 때 ‘에이, 내 빨리 이것 그만두어야지.’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이오덕 선생님도 그랬다. 《이오덕 교육일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사표 써야겠다’, ‘어서 빨리 이 짓 그만두어야지’, ‘농사지으며 살아야지.’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로 교직을 그만두지 못하니 그 다음으로 해 보는 것이 학교를 옮기는 것이다. 다른 학교로 가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지만 어디를 가든 다 똑같다. 그런 중에도 늘 선생님 가까이에서 동무가 되어 기쁨을 주는 것이 산이요, 나무다. 자연이다. 그 자연을 닮은 아이들이다.

백일장 행사가 글짓기 교육을 망치고 있다. 작품의 심사도 제대로 되기를 바랄 수 없다. 출제도 옳게 못하는 사람들이 작품인들 어찌 바로 보겠는가?
막차 시간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냇가에 가서 놀았다. 백일장이고 뭐고 오늘처럼 즐겁게 하루를 보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래밭에서 아이들(모두 열다섯 명)은 모래산을 쌓고, 못을 막고, 물장난을 치고 했다. 가만히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어느덧 같이 모래를 쌓고 물장난을 하였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잔디밭에 가서는 씨름을 하고, 또 그 밖에 아이들은 온갖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글짓기고 시 짓기고 그까짓 것이 다 뭘까?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는가? 저녁때가 되어도 아이들은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돌아오면서 엿을 사 주고, 나도 먹었다. 아이들 속에서 하루를 보낸 오늘은 너무 즐거운 날이었다.(1권, 51∼52쪽)

애당초 백일장 같은 곳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었는데 교장, 교감 선생 때문에 할 수 없이 참여했던 것이다. 상 타서 제 체면이나 올릴까 생각하는 교장이나 아이들 교육을 망치는 백일장 행사 때문에 화난 선생님 마음을 아이들이 풀어 준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다 “어느덧” 선생님도 같이 모래를 쌓고 물장난을 한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어느덧 아이가 되어 함께 물장난하는 선생님.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시란 말인가. 선생님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철따라 꽃이 피고 잎이 우거지고 단풍이 들고 눈이 덮이고 산 경치가 너무 아름다운”1) 마을에서 살았다. 나무처럼 산처럼 선생님은 평범한 산에 둘러싸여 그 산을 사랑하며 살다가 자연의 길을 갔다.
선생님의 삶과 교육의 바탕은 바로 자연이었다. 평범한 산이 있고 평범한 나무가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그런 자연스런 삶, 그것을 아이들과 느끼고 나누는 교육, 이것이 이오덕 선생님이 꿈꾸는 삶이요, 교육인 것이다.

4.
선생님이 엮은 글모음 책에서 읽은 시를 《이오덕 교육일기》에서 만나는 것은 더욱 반갑다. 〈송구〉라는 시가 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산이나 들에서 구해 먹는 것들을 조사했더니 송구(송기)·짠대·참꽃·뽀해기·모메·오요 강아지…… 이런 것들이었다 한다. 산이나 들에서 이런 것을 따 먹거나 캐 먹거나 꺾어 먹었던 일을 잘 생각해 내서 시를 쓰도록 하였는데 그때 3학년 김숙자가 쓴 시가 〈송구〉이다. 재미있는 시가 여러 편 나왔는데 한 편을 적어 둔다며 선생님은 1970년 4월 17일 일기 끝에 적어 두었다.

송구
3년 김숙자

한 개 벗겨 가지고 먹으니까
물이 서북서북한 게 아주 단 게
송구도 덜 벗겼는데 춤이 꿀꿀 넘어가서
훌훌 핥아 먹었다.
막 훑어 먹었다.
한 개 다 먹고
꽁알 주까 새알 주까 쌔
했다.(1권, 292쪽)

송구는 소나무 속껍질을 말한다. 아이들은 산에 가면 소나무 가지를 꺾어 겉껍질을 벗겨 내고 속 부분을 핥아 먹는다.2) 《일하는 아이들》에는 첫 행이 “송구 한 개를 벗기니”인데 여기에는 “한 개 벗겨 가지고 먹으니까”로 되어 있다. “송구 한 개를 벗기니”는 그냥 먹으려고 벗기는 거겠지만, “한 개 벗겨 가지고 먹으니까”는 입에 침이 돌고 빨리 먹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먹으니까’에 빨리 먹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더 담겨 있는 것 같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 송구를 먹어 보는 거지만 그것이 주린 배를 어찌 다 채워 주겠는가. 아이들은 “꽁알 주까 새알 주까 쌔” 하며 다 먹고 난 막대기를 내던지면서 먹을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막대기에 새알이라도 줍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보는 것이다. 꿩알이건 새알이건 주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웃음이 나오다가 배고픈 아이들 삶에 마음이 짠해진다. 어른들 잘못으로 굶주린 배, 자연이 아이들을 품어 준다.
아이들이 산이나 들에서 먹는 것을 조사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될까. 보릿고개를 넘기는 아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송구 벗겨 먹고 참꽃 따 먹는 일은 가난한 아이들이 봄을 이겨 내는 현실이다.

참꽃 한줌 따먹고
나물을 하세.
찔레순 한줌 따먹고
나물을 하세.

숟가락 같은 건 숟가락나물,
우산 같은 건 우산나물.
보는 대로 다 하세.
아는 대로 다 하세.

꿩아, 꿩아, 푸드득
날아가는 꿩아,
네 병아린 어디 있나?
넌 무얼 먹고 사나?

삘기 하나 뽑아 먹고
나물을 하세.
짠대 한 뿌리 캐어 먹고
나물을 하세(〈산나물 하러 가세〉3) 중 일부분)

이 시는 후렴으로 “이 나물을 해서/ 이 봄을 살고,/ 이 나물을 해서/ 이 해를 살고.”가 붙어 있다. 3학년 김숙자는 〈송구〉를 쓰고, 선생님은 〈산나물 하러 가세〉를 썼다. 선생님 시는 아이들 삶을 보고 겪고 느낀 것이 그대로 시가 되기도 했는데 〈산나물 하러 가세〉도 그런 경우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할 가난한 아이들이 참꽃 따 먹고 찔레순 따 먹고 삘기 뽑아 먹고 짠대 캐어 먹는 이야기가 그대로 시가 되었다.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나물 캐는 일로써 그 가난을 건강하고 자신 있게 이겨 내게 해 준다. 이래서 아이들의 삶과 놀이와 자연이 하나가 된다.
글쓰기로 아이들은 자기 삶을 풀어 내고 선생님은 아이들 마음을 달래 주었다. 글쓰기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억눌린 마음을 해방시켰다. 선생님의 참된 삶, 참된 마음이 참된 교육이 되었다.
5.
《이오덕 교육일기》를 읽고 교육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참교육이 되는가 생각해 보았다. 어떤 훌륭한 교육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의 삶이다. 교사가 정직하게 사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 될 것이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늘 답은 쉽고 간단했다. 교사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정직하게 사는 것, 그래서 학교와 이 사회가 정직한 세상이 되는 것, 아이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교육이 있겠는가.
선생님은 “이 일기를 보면 나부터 얼마나 엉터리 교육자였던가”를 잘 말해 줄 것이라 했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이 고맙다. 한 인간으로서, 교사로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욕하고 사랑하고 이겨 내며 올바른 교육의 길을 찾고자 애쓰는 이야기가 고맙다. 선생님은 부정한 세상에 타협하지 않으려고 때마다 기록하여 스스로를 일깨운다. 이 책에는 정직하게 살고자 애쓴 평범한 교사 ‘이오덕’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페스탈로찌 같은 사람이 만약 우리 교육계에 있다면 어찌 될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교사로 낙인이 찍혀 산골 어느 학교에서 묻혀 지낼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불행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행정의 중압을 물리치려고 열렬하게 싸우는 투사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다가 벌써 오래 전에 학교를 쫓겨났거나, 모두가 가기를 꺼려 하는 벽지를 전전했을 것이다. 이 기록은, 무수한 참 교육자들이 쏟아져나올 법한 우리 분단 44년 비통한 역사에서, 어째서 가슴에 번쩍번쩍 자랑하는 훈장 타는 교육자는 많지만 위대한 교육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에도 대답해 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교육 목표를 어떻게 세워야 하고, 장학을 어떤 태도로 해야 하며, 교육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데 적지 않은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1권, 머리말 중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들 앞에서는 죄인’이다. 이 기록은 이제 우리 몫이 되었다.
(이기영 님은 우리 회 이사이며 출판문화위원회에서 일한다.)

주
1) 이오덕, 《나무처럼 산처럼》, 도서출판 산처럼, 2002, 78쪽
2) ‘송구’는 송기란 것인데 소나무의 속껍질을 말한다. 옛날에는 봄에 송기떡, 송기죽을 만들어 먹었고, 아이들도 산에 가면 소나무 가지를 꺾어 겉껍질을 벗겨 내고 속 부분을 핥아 먹었던 것이다. 다 먹고 하얀 막대기만 남으면 ‘꽁알(꿩알) 주까(주울까) 새알 주까 쌔!’ 하면서 그것을 내던지는데, 막대기가 목표하는 곳에 생각대로 떨어지면 그날은 멧새알이나 꿩알을 줍게 될 운수 좋은 날로 여겨서 좋아했던 것이다.(《일하는 아이들》, 이오덕 엮음, 보리, 86쪽)
3) 《개구리 울던 마을》(이오덕 지음, 창비, 1981년 초판)에 실려 있다. 이 책은 1부 “진달래”(1953∼1966년), 2부 “탱자나무 울타리”(1967∼1969년), 3부 “씨앗을 뿌리며”(1970년∼현재)로 구성되어 있다. 2부에 실린 시들은 《이오덕 교육일기》에 나오는 아이들을 더욱 실감나게 만나게 한다. 2부에 〈복숭아꽃 핀 아침〉이란 시가 있는데 1967년 4월 12일 일기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출석을 부르는데 한옥순이라는 아이가 안 왔다. “옥순이가요, 오늘 아침 우리 집에 밥 얻으러 왔어요.” 옥순이는 거지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돌아갈 때 급식 빵을 대여섯 개 싸서 옥순이 갖다 주라고 보내고 “복숭아꽃 오얏꽃이 환히 웃는 이 봄날 아침에” 거지로 사는 옥순이를 생각하며 〈복숭아꽃 핀 아침〉이란 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