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시 한편
여우
권혁웅            

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여우가 그녀 주변을 돌아
다니고 있었다 나를 처음 알아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 여우
였다 긴 치마에 가방을 모아 쥔 손이 가지런했다 흰 발목
과 꼬리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여우
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여우가 나를 알아보았을 때 겨우
열 다섯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삼 년 후에 다시 여우를 만났다 한성여자고등학교 하교
길. 여우는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나는 몰래 여우를 따라갔다 골목
을 돌아 한 대문 앞에서 꼬리를 놓쳤다 집에는 병든 노모
와 아이들이 보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겨우 열여덟
이었으므로,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대학 때에 그녀를 만났다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와 백년해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
해 안 건 아홉에 하나였다 왜 열이 아니냐고 물어볼 사람
은 없겠지 그녀와의 보금자리는 늘 풍찬노숙이었다 천 일
을 하루 앞 둔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나를 버렸다

그 후로도 자주 여우가 출몰했다 어떤 여우는 몇 년 동
안 내 그림자를 밟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어떤 여우는 내가
맛이 없다고도 했다 여우인 줄 알고 버렸던 그녀가 몇 년
후에 여봐란 듯이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때마다 간이 아팠
으나 며칠 후면 새살이 돋곤 했다

나는 아직도 겨우일 뿐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다
음이 궁금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뒷이야기를 기록할 여
백이 없다 여우는 겨우 말하면 달아난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우 이야기는 늘 미완이다


조밭 매기
백석현 - 안동 대곡분교 3년            

나와 누나와 대연이와
조밭을 맸다.
두 골째 매다니
땀이 머리가 젖도록 흐른다.
땀이 흘러 눈을 막는다.
이럴 때 목욕했으면 좀 좋을까?
풍덩! 물 속에 들어갔으면!
햇볕에 시드는 풀 냄새가 섞인
쌔도록한 냄새의 바람이 분다.
그러다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아, 시원하다.
누나가
대연이 색시 바람 불어오는구나, 한다.

1970년 7월 24일

*매다니 : 매다 보니, 매니까


맑은 햇살 한자락에서 보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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