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곁의 시한편

내 곁의 시 한편

소리 없는 흔적

김상미

내가 밤새워 시와 씨름할 때, 그 여자는 추어탕을 끓이고 보쌈을
만들고 양념 더덕구이를 철판에 구워냈다,
내가 은밀한 생이나 열정을 읽고 그 속에서 사랑에 녹슨 마음을 닦
고 있을 때, 그 여자는 상추를 심고 파밭의 벌레를 잡아내고 깻잎에
물을 주었다
내가 엘렌 식수나 두스 이리가레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속에 갇힌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심사숙고하며 피 흘릴 때, 그 여자는 아이들을
키우고 가락동 수산시장을 몇 바퀴 돌아 등 푸른 생선을 사고, 남편
몰래 친정 어머니께 용돈을 부쳤다.
내가 남의 글을 수선해 주고 받은 돈으로 밥과 담배를 사들고 집으
로 돌아올 때, 그 여자는 쨍쨍한 햇볕에 말린 이불보와 깨끗이 닦아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창문을 닫고 있었다.
내가 한밤중 마주해선 안 되는 운명을 달빛에 말리며 울고 있을
때, 그 여자는 침실과 욕실, 부엌만을 드나들면서도 온 몸에 출렁이는
달빛을 받고 있었다. 디디는 곳마다 반짝이는 발자국 달빛에 씻어 내
리고 있었다.

'더 좀'병

정채봉

성년이 된 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을 꾸며보는 것이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하였다.
이내 아기가 생겼다.
그는 처자식을 가졌으므로 집이 있어야 했다.
간신히 집을 장만했다.
집이 있고 보니 이번에는 남들처럼
가족이 함께 탈 차가 필요했다.
드디어 차를 샀다.
차를 사서 움직여보니 돈이 '더 좀' 있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더 좀'을 연발했다.
집을 '더 좀' 넓히고,
차를 '더 좀' 큰 것으로 바꾸고
품위 유지가 '더 좀' 필요하고,
'더 좀' 때문에 바깥 일이 바쁘다보니
자연 집안일에는 '더 좀' 무관심해져갔다.
나중에는 숫제 하숙하는 사람 같았다.
간혹 불평하는 가족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 좀 잘살기 위해 이러는 것이니 참으라."
그런데 '더 좀' '더 좀' '더 좀'하다보니
나중에는 빚을 얻어야 했다.
'더 좀' 끗발을 부리기 위해서는.
그런데 어느 날 '더 좀'이 견디다 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부도가 난 것이다.
파도는 사정없이 달려와서
그의 가정까지도 무너뜨렸다.
그는 빈터의 주춧돌 위에서 생각해 보았다.
"왜 '더 좀'병에 걸렸었지?"
부자, 품위, 차, 집하고 관계가 있지.
그런데 처음 목표인 행복한 가정에는
필요 없는 것이잖아."

소리 없이 실속있게
한세상 야무지게 살다 가야 하는 것을
나는 당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의 맑은 햇살 한자락에서 보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