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곁의 시한편

내 곁의 시 한편

백련사에 두고 온 동전 한 닢

안상학

누군가 나에게서 떠나고 있던 날
나도 내 마음속 누군가를 버리러
멀리도 떠나갔다 백련사 동백은
꽃도 새도 없이 잎만 무성하였다 우두커니
석등은 불빛을 버리고 얻은
동전을 세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을 모으게 했을
잘 안 되는 일들의 기록을 살피고 있었다
나도 내 잘 안 되는 일들의 기록을
동전 한 닢으로 던져 주었다, 석등은
내 안의 석등도 오래 어두울 것이라 일러주었다

가질 수 없는 누군가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 꽃등 없는 동백나무 한 그루
끝끝내 따라와서 내 가슴에 박혀 아팠다
백련사 석등에게 미안했다 누군가에게
너무 오래 걸린 이별을 바치며 미안하고 미안했다

(『사람의 문학』200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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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후

박인숙 - 울진 온정국교 3년

비가 오고 산을 보니까
맑고 깨끗하다.
햇빛이 나뭇잎을 말려 주려고
비춘다.
산이 참 아름답다.
나뭇잎이 빗방울을
똥 똥 띠기고 있다.
아직도 비한테 젖어 있다.
햇빛이 계속 비추어 준다.
나무들이 싱싱해졌다.
꽃도 비한테 젖어서
빗방울을 똥 똥 띠기고
웃는다.

낡은 집에 깃들이기
안상학

낡은 집에 깃들이고 산 지 반년이 지났다. 살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버려지다시피 한 낡은 집에 정 붙이며 살고 있다. 그 동안 감꽃이 피고 지고 감이 열리고 잎이 떨어지고 지금은 홍시만 남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 집의 나이에 견준다면 세월도 아니지만 흉가만 같던 집이 이젠 제법 사람의 훈기가 돌아서 정겹다. 금방이라도 쥐새끼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미가 집을 짓던 헛간에는 새로 들인 농구들이 흙벽에 기대고 서있다. 아직 낡은 기운이 죄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리저리 사람의 기운을 먹고 얼굴을 펴고 있다.

사람들이 살다가 떠난 집은 금방 낡고 이울어 흉가처럼 변해버린다. 조금만 눈 돌려서 살펴보면 비어 있어서 낡아 가는 집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살기 어려워서 집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지만, 그런 집에 누군가 다시 들어가서 살기도 그만큼 어려운 게 농촌 현실이다. 귀농, 귀농 하지만 떠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오늘의 농촌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집은 그렇게 우두커니 남아서 거미가 사는 집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얼마 전 지경산 골짜기에서 보았던 집은 아예 칡덩굴이 뒤덮고 있어서 집인지 산인지 분간이 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이용악 시인의 시 「낡은 집」은 그 시대에 쓰여졌지만 오늘의 현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에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집은 지금도 우리 농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인들도 그와 같은 모티브의 시를 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때의 유이민들이 남기고 떠난 집이나 오늘날의 이농민들이 남기고 간 집이나 시인들의 가슴에 파고드는 무게는 같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농사를 작파한 우리 아비 어미도 집을 버리고 안동 시내로 옮겨 앉았었다. 내가 두 살 때였으니 오래된 이야기다. 내가 첫울음을 터뜨렸던 집.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에 누가 살았는지-물론 거미가 살았겠지-언제 무너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 후로 시내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다니며 변변한 집 한 칸 없이 살다 가셨다. 대체로 집을 버린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근대의 허구 속에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그렇게 흘러 다니는 백성들이었다. 낡은 집은 근대가, 산업화가 생산한 초라한 초상이다.

내가 낡은 집을 얻은 것은 글을 쓰는 공간으로 쓰려고 한 것이다. 무슨 호사냐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면서 굳이 시골의 낡은 집을 고집한 것은 나름의 까닭이 있어서다. 콧구멍 만한 아파트에서 벗어나서 흙과 자연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싶은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집에 딸린 한 마지기 밭을 일구며 흙과 교감하고 자연과 오래 숨쉬며 마음을 다스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장일과 사회활동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처지로는 얼마 되지 않는 농사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밭은 잡초로 뒤덮이기 일쑤였다. 풀밭에서 감자를 캐고 고추를 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집을 손보는 일도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들었다. 멋지게 집을 가꾸며 흙과 자연을 벗삼으려던 생각이야말로 호사였다.

그렇지만 배운 것도 많다. 이웃 어르신네들의 살가운 정을 느끼며 사람 사는 맛을 느낀 것이라든지 혼자만의 생활이 가져다주는 내면화의 시간이 나름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농사도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자연도 저처럼 긴 호흡을 가지지 않으면 조금도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큰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낡은 집에 제대로 깃들이려면 빠르면 2년, 늦으면 3년이라고 한다. 마음 바쁘지 않게 천천히 하나하나 둥지를 매만지는 까치처럼 깃들이기 전에 둥지를 먼저 살필 일이다. 대문 위에 걸려 있는 초란-닭이 처음 낳은 달걀-엮음과 안방 구석자리의 용단지틀에 깃들인 다산과 풍농, 뒤란에 매달려 있는 들기름병에 깃들인 무병과 장수, 이 모든 것들에 깃들여 있는 먼저 산 사람들의 살뜰함을 배울 일이다.

오늘도 나는 시내를 따라 난 황톳길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서있는 커다란 떡버드나무에게 인사한다. 집 옆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에게도 그 옆 감나무에게도 말을 건넨다. 담장 위에 하나 남은 늙은 호박과 거름더미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방울토마토가 건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올 봄에 옮겨 심은 담장 아래 홍매나무 한 그루의 단풍이 곱게 눈을 흘긴다. 저처럼 튼튼하게 뿌리내리라고, 정신 차리고 낡은 집에 깃들이라고 마구 눈을 흘겨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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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맑은 햇살 한자락에서 보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