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곁의 시한편

내 곁의 시 한편

소쿠리에 관한 각서

허만하

쓰레기터에 버려진 구겨진 소쿠리는 결을 잃어버린 주검이 부끄
럽다고 생각한다.
선반 위 뚜껑이 있는 상자와 달리 열린 에스프리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소쿠리. 외양은 순박하지만 소쿠리는 간교한 눈치꾼이다.
자기를 잡는 사람 자세에 따라 담는 내용을 재빨리 바꾼다. 양켠 테
를 잡고 허리를 뒤로 재낄 때면 번득이는 가을 햇과일을 가득 담는
다, 수직으로 허리를 펼 때면 제수용 부침을 담는다. 소쿠리의 눈치
는 잡는 사람 체위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 씨름선수 같다. 머리쪽
테가 잡히고 아랫도리가 첨벙 첨벙 논두렁 흐름 속에 잠기면 벌써
갈색 미꾸라지 은빛 몸부림을 담고 있다. 풀잎과 어정어정 어색한
물새우 걸음걸이를 바닥에 깔 때도 있지만 형태도 없이 무겁기만
한 물은 비워 버린다.

드물게는 시렁 위에서 잠들지만 대체로 소쿠리는 그으름 끼인 시
커먼 부엌벽에 밤나비처럼 가만히 붙어 있다. 보호색이다. 숨을 멈
추고 엷은 그으름 빛을 조용히 내뿜고 있는 소쿠리. 자기의 개인 사
를 잊어버린 이때가 소쿠리의 가장 쓸쓸한 때다.

한 때 쌀 뒤주가 차지하고 있었던 빈 자리처럼 소쿠리는 이제 잊
혀진 자리로만 있다.

해질 무렵

김희정 - 경북 의성국교 5년

오늘따라 저녁이 왜 이렇게 밝을까?
저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든 저녁놀, 누가 색칠을 하지 않아
도 붉게 된 저녁놀. 나와 내 동생은 저녁놀을 무척 좋아한다.
어느 날의 일이다.
마루에서 밥을 먹다가 갑자기 밝게 되었다. 모두들 뛰쳐
나와 서쪽 하늘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저녁놀이 없어지고 밤 하늘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밥 먹으려고 마루에 가니까 밥상이 부엌에
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의 밥 먹는 태도가 되어먹지 않았다
고 하시면서 오늘 저녁은 굶으라고 하셨다.내 동생과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한참 화를 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또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오늘은
저녁놀이 보이지 않았다.
철없는 내 동생은 "오늘은 저녁놀이 깊게 잠을 자는구나.
어제 늦게 동안 물이 들어 피곤해서 잠을 자는구나." 하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우리들은 저녁놀을 좋아했다.
나는 저녁놀을 향하여 "저녁놀아! 저녁놀아! 아름다운 저
녁놀아! 내일도 모레도 저녁놀이 끼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해
다오!" 하고 힘차게 외쳤다.

제목 :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쓴 사람 : 김상국

1.
여기가 어디일까. 깨어 보니 온통 모래뿐. 인적도 없다. 머리가 어지럽다. 어느 사막? 소름이 돋는다. 훅훅 거리는 열기, 바람, 하늘.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갈증이 나고 허기가 진다. 두렵다. 외롭다. 안돼, 난 살아야 해. 얼마쯤 걸었을까. 저 앞쪽에 나무와 호수 같은 게 보인다. 오아시스가 틀림없다. 힘이 솟는다. 그런데 아뿔싸, 그것은 신기루였다. 살 가망이 없다. 모래바닥에 푹 주저앉는다. 그 때다. 저 앞쪽에서 비행기 같은 것이 낮게 떠온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두 손을 허공에 정신없이 흔들었다.

2.
누군가 어깨를 흔든다. 꿈을 꾸면서 허공으로 팔을 휘젓고 있었던 같다.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다 때마침 이상한 행동을 발견했을 망정이지. 시트 등받이를 만지니 축축하다. 악몽이었다.
하지만 꿈은 반대로 해석하라고 했으니 앞날에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때마침 기내 스피커에서 비틀스의 ‘Let it be’가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평소 좋아하던 곡이다. 애잔한 가락을 들으면서 잠시 눈을 감는다. 그러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솟는다.
오전 7시. 아직 실내는 어둡다. 나는 손바닥 보다 조금 더 큰 블라인드를 올려 창을 내다본다. 하얀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장엄한 태양. 햇빛에 반사된 하늘은 더욱 푸른 빛을 구름 위에 토해놓고 있다.
그 때 기내 방송이 나온다. 기장의 음성은 매우 낮게 가라앉아 있다. 게다가 말이 워낙 빠른데다 발음도 주문처럼 알아듣기 어렵다.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짐작해보니 LA 상공 어디쯤인가 온 것 같다.
창 밖 아래로 투시되는 잘 정열된 땅. 여기가 낙원인가. 헝클어진 내 인생. 그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석 달 전쯤. IMF 한파로 나라가 온통 벌집 쑤신듯 어지러울 때였다. 어느 날 회사 복도에 하얀 종이 한장 덩그러니 나붙었다. 미국 LA지사 파견인력 모집 내용이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선발되기만 하면…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쳐들었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퇴근을 넘긴 시간이라 주변에 직원들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선발인원이 단 한 명이라는 사실. 그럼, 경쟁률은? 하고 생각하니 스르르 손에 힘이 빠진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 지원서를 낸 뒤로는 어찌나 바빴는지 지사 따위는 기억의 언저리에도 없었다.
그런데 한 달 전쯤이었다. 영업팀의 상무가 갑작스레 호출하는 게 아닌가. 올해 불경기로 영업 실적이 바닥인데 보나마나 무슨 닦달이나 하려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그간 수고 많았네. 회사가 어려울 때 자네가 좀 도와줘야지 않겠나.”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도 열심히 일했는데... 순간 ‘명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그 시대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상무의 날카로운 외침이 뒤통수를 때렸다.
“허허, 왜 이리 놀라나. 자네, 해외 지사 지원하지 않았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사실 미국 지사를 지원한 이면에는 남 모르는 아픈 사연이 있다. 2년 전. 아내는 더 이상 못살겠다며 헤어지자고 요구했다. 결국 이혼을 한 뒤 아내는 코흘리개 아들만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아내 역시 ‘이혼녀’라는 딱지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미국을 택한 것일까. 그녀가 유교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해 이혼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으로 괴로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녀는 이모가 사는 LA로 미련없이 떠난 것이다.
그 뒤로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아무도 그녀가 있는 곳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머나먼 이국 땅 어디에서 내 아들을 찾는단 말인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후회스럽다. 바이어를 만날 때면 늘 술 상무는 내 차지였다. 물론 그 술 덕에 20대중반에 부장 자리에 올라 동기생들로부터 시샘을 받긴 했다. 하지만 결과는? 맨날 새벽녘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와 넉장거리를 치는 남편을 물끄러미 보는 아내. 물론 이 정도야 아내가 이해해준다 손치더라도 이 사건 만큼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아내는 이를 빌미로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어느 날 상무가 단출하게 술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가랑비는 오고 은근히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다.사실 그 날이 아내 생일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거래처 초상집에 간다고 둘러댔다. 어찌나 능갈쳤던지 아내도 그대로 속아넘어가는 것 같았다. 쾌재를 부르며 택시를 타고 단골 룸 살롱으로 내달렸다.
방배동 어디쯤인가 그랬다. 마치 아방궁 같았다. 아가씨들도 그 날 따라 정말 예뻐 보였다.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그 날 밤 우리는 아가씨들을 껴안고 나왔다. 어느 여관 앞 가로등 아래 이르렀는데, 바로 그 때였다. 어둠 속에서 “미친 놈”하며 송곳 날 같은 외마디가 날아들었다. 술이 확 깰 정도였다.
“뭐, 초상집에 간다고? 잘들 논다 놀아.”
아내는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회사 근처로 달려와 줄곧 미행한 것이다.

3.
거울을 보다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눈가에 작게 패인 주름살이 이 날 따라 더 깊고 가뭇하게 보였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삶 속에 녹은 고통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서른 셋. 아직 젊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세파에 찌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삶의 의욕을 잃기 일쑤였다.
LA에 온 지 어느새 2년이 훌쩍 지나갔다. 기억조차 싫은 해빙기의 아침. 코흘리개 아들을 등에 업고 서울을 떠난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눈에 선하다. 사랑했던 한 사내의 추악한 모습. 인간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나. 그것은 그들이 결혼하면서 소중히 가꿔 온 이상의 날개없는 추락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차라리 잊기로 했다. 잊어야만 살수 있다. 그녀는 이제 거머리 같은 과거의 집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는다. 치열한 현실로 돌아와 아비 없는 자식을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 뿐이다. 나중에 아들이 커서 ‘호로자식’이란 소릴 듣지 않게 되길 바랐다. 그것이 가련했던 그녀를 담금질하는 밑바탕이 됐다.
이모의 도움으로 간신히 뷰티 샵, 네일 샵, 레스토랑 등에서 닥치는대로 일했다. 그 덕에 단 물 쓴 물 다 맛봤다. 이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삶의 여유도 생겼다. 다행히 돈 많은 이모의 도움으로 아담한 하우스도 마련했다. 이제 남 부러울 게 없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주말이면 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잠시나마 세속을 벗어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그런 그녀도 밤만 되면 답답하고 허전한 가슴을 달랠 길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외로움이 치밀어 모든 세상사가 슬퍼지는 탓이다. 게다가 “아빠 언제 와?” “아빠 보고 싶어”하며 그 녀석이 하는 말을 들을 땐 정말 눈물샘이 마를 정도였다. 아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4.
그녀는 얼마 전부터 이혼한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사성어에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 그녀 역시 개인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다고 느끼고 있다. 어떤 ‘외로움의 보상심리’라고 할까. 회원은 30여명이나 됐다. 젊은이부터 황혼에 이르기까지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 남자도 있다. 이들은 매월 한 차례 만나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런데 회장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이 왔다. 금요일 저녁때 토렌스 리돈도 비치 피어에서 ‘번개’를 갖자는 게 아닌가. 정례모임은 아니지만 새 회원도 소개하고 다음 야유회에 대해 논의하자는 취지였다.
그녀는 미국에 와서 처음 보라 빛 원피스를 찾아 입었다. 꼭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웬일인지 그 날 따라 입고 싶었고, 또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눅눅한 바닷바람이 쉴새 없이 피어(부두)를 때린다. 어둠에 묻힌 파도. 피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카페는 피어 맨끝 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먼 발치에서도 몇몇 회원들이 눈에 띈다. 내부의 동선은 완만한 곡선으로 설계돼 있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빛의 밝기가 점점 약해졌다. 게다가 곳곳에 벤자민 등 화분이 시야를 가리고 있다.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맨 구석진 자리에, 화분에 가려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참 이상했다. 점점 마음이 끌려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그 때 회장이 다가와 신입회원이라며 한 사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가까이 다가서자 얼마나 놀랐는지 숨이 멎을 뻔 했다. 일어나서 모자를 벗는 그 사내의 모습은 영락없는 그이였다.
“……”
정지된 시간 사이로 침묵이 흐르고 있다. 워낙 뜻밖이라 말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순간 두 남녀의 뇌리에는 쓰라린 기억들이 빠르게 스친다. 사실 이럴 땐 얼마간의 침묵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너무나 반갑기도 했고, 서로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없지 않았다. 이혼으로 인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무슨 말로 이런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 때였다.
“미안합니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터진 말문이었다. 쌓인 회환을 일시에 풀려는 듯 서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솟구쳤다. 일행들도 이들의 재회를 축하하며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다.
“여보, 용서해주겠소? 우리 아이를 봐서라도…다시 행복하게 살고 싶소.”
“당신도 고생 많았겠지요? 정말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어요. ”
짧은 대화가 끝나자 둘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카페 어디선가 사이먼과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곡이 희미한 조명 아래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