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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또는 전설 |
| 홍윤숙 |
겨우내 먼지 쓰고 걸려있던 버버리 주머니에서
그날 아침 잠자던 기차표 한 장을 찾아내었다
가위 자국도 나지 않은, 행선지만 또렷이 내일이라 찍힌
미지의 새하얀 차표 한 장
복권에 당첨된 듯 설레며 들뜨며
그 길로 신록의 숨가뿐 골목길을 빠져나와
서울역 광장 시계탑 앞으로 달려갔었다
내 친구 희망이며 꿈이며 그리움들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파랗게 돋아나는 스무 살의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숨이 차서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고개 드니
그들은 벌써 저만치 가로수 잎사귀 반짝이는
햇살로 녹아버리고
한 장 기차표도 간데 없이 사라지고
붐비는 개찰구 어느 시간표에도
내가 탈 행선지는 적혀있지 않았었다
덩달아 하늘에 여기저기 먹구름 끼인
빗발이 푸득푸득 떨어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간간이 포소리도 쿵쿵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낙담하고 가던 길 돌아섰지만
각기 제 안에 샘솟는 분수 하나가
먹구름도 포소리도 툭툭 차버리고
또각또각 구두발을 찍으며
다시 거리를 활보했었다
참 아득한 신화 하나 아니, 전설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은 왜
온통 눈부신 신록으로 만발해 보일까
추운 날 캄캄한 날 그리 많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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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하기 |
| 황정미 - 경북 대서국교 5년 |
모내기를 하다가 집으로 왔다. 하루 동안 모만 심고 햇볕
을 많이 받아 더웠다. 내가 모심기를 지겨워하니 집으로 가
밥을 하라고 하였는데 막상 집에 와 보니 집안도 엉망이고
부엌에도 그릇을 씻지 않아서 더러웠다. 먼저 그릇을 씻고
쌀을 씻어서 밥을 앉혔다. 물이 너무 많이 있어도 안 되고
적게 있어도 안 되고 밥솥에 밥을 앉혀 놓고 스위치를 꽂
았다.
밥상을 가지고 나와 상을 닦고 반찬을 다시 얹었다. 된
장을 뜨수고 밀가루 반죽을 하고 호박을 씻어서 싸려서 찌
짐을 구웠다. 참 바빴다. 이마에서는 땀까지 흘러내렸다.
찌짐을 한참 굽노라니까 언니가 왔다. 언니도 도와주었다.
언니가 방에 들어가서 전기 밥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빨리
"언니, 밥 잘 되었어?"
라고 물어 보았다. 언니가 밥이 잘 되었다고 하였다. 한참
있으니까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들이 오셨다. 저녁을 먹을
때 모든 식구가 내가 했는 밥을 잘 먹는 것 같았다.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칭찬까지 해 주셨다. 어머
니는,
"정미도 부엌에 입학했다."
라고 말씀하시니까 듣고 있던 언니가
"정미야, 너 부엌에 입학하지 마. 부엌에 입학하면 설거
지해야 돼."
라고 언니가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와 오빠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매일 이런 즐거운 생활이 계속되면 좋겠다.
1984.7.2.
뻐꾸기 소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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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개
아다다
잠언처럼 깔린 안개
몸을 담은 신발이
한쪽이 채워지지 않아
자꾸 기우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다
"여자는 사랑받는게 최고지"
"사랑받고 돈받고 모르니"
새의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간
자개 화장대 앞에서
여자를 지운 뒤
엄마로 산 구질한 변명
사진틀 속에 그가
늘 불안하게 나를 바라본다
꽃에 전이 되어
날아가버린 오드비 향수
가명으로 살던 아픔이
당의정 한알의 약효에
잠깐 물러 섰다
끈질긴 습관 처럼 다가선다
한잔의 낮술이 유머가 될 때
씁쓸한 웃음의 무게
막아서는 산도 희망이 될까?
안개에 잠긴 길이 축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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